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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톤즈의 하늘 아래, 한 사람의 이름 - 이태석 신부님을 기억하며"

by record7420 202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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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로부터 입수된  Lagos Food Bank Initiative 님의 이미지 입니다.

 

🕊️  아주 먼 나라, 아주 가까운 사람

사람의 삶은 때때로, 거리나 시간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가슴에 스며든다.
이태석 신부님이 그런 분이었다.

그는 남수단 톤즈라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하루 넘게 걸리는 먼 나라의 한 마을에서
자신의 남은 모든 시간을,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내어놓았다.

의사였고, 신부였으며, 선생님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를 ‘성인’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싶다.”

그 말처럼 그는 하나하나,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몽땅 꺼내어 나누었다.


🩺  흰 가운과 수도복 사이에서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의사’가 꿈이었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한 뒤,
어느 날 문득, ‘더 깊은 치유’를 위해 신학의 길로 향하게 된다.

신학을 공부하며, 그는 깨달았다.
질병만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공동체를,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삶.
그 길을 가고자 그는 사제 서품을 받고,
2001년,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로 떠났다.

거기에는 병원이 없었고,
학교도 없었고,
사람들은 총과 전쟁과 가난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   톤즈, 생명이 다시 시작된 땅

톤즈에서의 그의 하루는 바빴다.
아침엔 환자들을 돌보고,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아이들과 음악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당신은 의사인가요, 신부님인가요?"
"나는 그냥 톤즈의 사람이에요."

그는 혼자 힘으로 학교를 세우고,
음악대를 만들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장학금을 마련했다.

그의 진료소에는 약도, 장비도 부족했지만
그의 눈빛과 손길만은 따뜻했다.
아이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
‘내일’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었다.


🙏  그리고 그에게 남은 시간

2008년,
그는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너무도 빠르게 병은 그를 약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
그는 그 말만을 반복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톤즈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그렇게 2010년 1월,
48세의 나이로 짧지만 깊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톤즈의 아이들은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  이태석, 이름이 아니라 길

이태석 신부님이 떠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의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남긴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그가 심어준 ‘희망’은
남수단의 땅 위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우리는 이태석이라는 사람을 기억할 때
그의 위대한 업적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조용한 헌신과, 꾸준한 사랑, 그리고 따뜻한 시선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정의한 사람이었다.


🌱 마지막 한 문장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위로받고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태석이라는 이름은
한 사람의 생애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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